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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쓰는 갈맷길 아라리 <3> 시인 김요아킴 '송정, 우리들 청춘의 요람이자 꿈'
부산작가회의  (Homepage) 2012-07-24 23:55:52, 조회 : 2,957, 추천 : 713


- 밤바다엔 별이 쏟아진다

나와 그녀는 십여 년 만에 다시 그 자리에 섰다.

이제 불혹을 넘긴, 생에 대한 약간의 여유로움이 두 손을 꼬옥 잡은 채로 수평선 너머를 관망하게 했다. 하나 둘 어선의 불빛들은 추억처럼 켜져 오르고 천식 같은 하얀 숨을 고운 모랫벌에 쏟아내는 송정(松亭)의 풍경은 붉게 물들어가는 해거름과 어울려 그 옛날을 더듬기에 충분했다.

주위는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몇 개의 큼지막한 숙박시설이 자본의 상징처럼 네온사인을 밝혀든 모습 외엔 포물선처럼 아늑하게 밀려온 해변과 그 끝으로 방점을 찍는 죽도(竹島), 그리고 이를 묵묵하게 지켜보는 야트막한 산허리는 예전 그대로였다. 간혹 비릿한 바닷물과 통정(通情)을 시도하는 갈매기가 동해남부선을 끼고 북상하는 기차 소리에 놀라 하늘 높이 솟구칠 뿐.

나와 그녀는 몇 개의 발자국을 남기며 천천히 상념에 젖어갈 무렵, 맨발의 우리들을 톡톡 건드리는 한 편의 시(詩)가 파도를 타고 우편물처럼 배달되어 왔다. 월전(月田)에서 대변항을 지나 용궁사 시랑대를 돌아 우리들 앞에 도착하기까지는 꼬박 십여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먼 파도에 실려 간

해송(海松)의 그림자 위로

모래처럼 쏟아지는 별밭을

맨발로 거닐다 만난 사랑



두레박으로 물 긷는 마음



수십 번의 옷깃을 스친

풀꽃 인연으로 바라다 본

바다 위로

비늘처럼 돋아난 달맞이 꽃



큰딸 아이의 눈망울이 되었다

-'월전(月田)에서 -분신. 1'

    

사실 나와 그녀가 처음 만난 것도 바닷가였다.

지금 서 있는 송정과 이름이 같은 남해 섬의 드넓은 백사장과 송림이 우거진, 해마다 부산의 모 문학단체에서 개최해 온 여름 시인캠프에서였다. 그해 여름은 지리한 장마와 함께 유독 사람들의 삶에 대한 불쾌지수를 높여 놓았다. 나 역시 휘청거리는 생에 대한 강한 연민으로 작정이라도 하듯 8월의 시작부터 3일간의 휴가를 얻어내었다.

직장을 잡은 이곳 항구도시는 3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낯설었다. 혼자라는 빈자리가 화석처럼 퇴적되어, 마치 대리인생을 사는 듯한 무미건조한 장면들이 나의 삶에 무수히 목격되곤 했다. 무언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절실함은 결국 나로 하여금 이 캠프를 선택하게 했고, 물론 생래적인 소심함 때문에 혼자가 아닌 대학 후배 녀석과 함께였다. 부산의 모 여고에 근무하는 후배도 객지생활로 인해 무척 힘들어하는 눈치였고 마침 문학을 좋아한다는 서로의 공통분모 때문인지 쉽사리 의기투합, 남해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협회에서 마련한 버스는 모두 3대. 문학청춘들의 시에 대한 열기는 요즘과 달리 한껏 고조되어 있었고, 물론 그 속에 그녀도 있었다. 되풀이되는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아끼는 시를 읽으며 얘기할 수 있다는 설렘만으로 나는 도착지까지의 시간이 어떻게 증발되었는지도 몰랐다.

이윽고 짐을 푼 시골 초등학교 낮은 건물. 몇몇 시인들의 소개와 각각의 모둠이 정해지고 나와 그녀는 운명적으로 2박 3일을 함께 보낼 가족이 되어 있었다. 이 삼 십대의 젊은 남녀 일곱 명으로 배정된 모둠에는 대학생과 직장인 그리고 문청(文靑)들이 대부분이었고, 저마다 풀어야 할 삶의 화두(話頭) 하나쯤은 가지고 이 자리에 모인 듯 했다. 매 끼니는 손수 준비한 음식과 식기를 이용해 해결해야 했기에 식사 당번을 정해야 했고, 마침 연장자 순에 의해 나와 그녀가 저녁을 준비하게 됐다.

개수대에서 서툰 솜씨로 양파를 까면서 흘깃 훔쳐본 그녀의 쌀 씻는 하얀 손가락, 그리고 영문학을 전공하고 외국무역회사에 다니다 얼마 전 그만두어 머리도 식힐 겸 이곳에 왔다는 싱그러움이 묻어나는 그녀의 목소리, 왠지 그녀의 두 이미지는 나의 마음 한켠을 자리 잡고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예전 대학 입학시절 느꼈던 풋사랑 이후 처음 갖는 그런 감정이었다.

그녀에 대한 호감은 점점 나의 텅 빈 마음과 반비례하며 캠프 마지막 날 모닥불이 꺼져가는 해변에서 마침내 터져 나왔다. 아마 몇 순배의 술이 돌고 모두 취기(醉氣)라는 용기를 등에 업고 서로의 속냇말을 자연스럽게 쏟아내는 자리였을 것이다. 누구는 생이 가져다주는 피할 수 없는 고통 때문에, 누구는 비이성적인 사회와의 불협화음으로 혹은 절망적인 글쓰기 때문에 힘들다며, 젊음이 원죄(原罪)인 듯 하나 둘 술잔이 스러지고 서서히 자리들도 비워져 나갔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녀는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모두의 말이 맞다는 듯, 아니면 자신의 삶이 그렇다는 듯 웃으며 때론 진지하게 연신 모닥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해의 별빛은 유난히 반짝였고 바닷물에 녹아든 달빛은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드디어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게다가 이번 캠프에서 시낭송과 백일장 모두 상을 받아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던 나였기에 어느 정도의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그 말을 대신할 뿐이었다.

그리고 만 3개월이 지난 부산의 송정 앞바다, 나와 그녀는 파도를 보며 나란히 앉았다.

늦은 오후, 월전 마을을 구경하고 대변항에서 그 맛있다는 멸치찌개로 저녁을 먹은 뒤 꼭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용궁사를 막 들른 다음이었다. 바닷바람은 서로의 체온을 요구하듯 제법 쌀쌀했다. 문득 나는 그녀와 만난 지난 몇 달을 회상하며 캠프가 끝나고 난 뒤 그녀에게서 걸려온 전화상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얼굴 한번 볼 수 있을까요'라는 그녀의 한마디, 얼마나 기다렸던 말이던가. 나는 속으로 뛸 듯이 기뻤지만 한편으론 솔직히 먼저 마음을 표현치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때 동행한 후배 녀석의 적극적인 응원이 있었기에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는 용기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그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을 할 거라 결심하며 찾은 곳이 바로 송정이었다. 물론 그녀와 처음 만난 남해 바닷가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도 있지만 나에겐 또한 남다른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했다.

갓 성년을 넘기고 처음으로 혼자 낯선 곳을 찾아 떠났던 곳, 완행열차를 타고 다시 버스로 결국 헤매다 마지막 발길이 닿은 곳, 하염없이 한 편의 글로 밤을 지새우며 어른이 되는 성장통을 겪어야 했던 곳, 내륙의 큰 분지도시에서 매캐하게 맡았던 최루가스와 부정한 시대를 향한 치기어린 울분 그리고 늘 광장 한복판에 서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렸던 자괴와 실연(失戀)의 상처까지를 모두 품어 주었던 곳, 송정(松亭).



이제는 덮어 둘 일이다

지난날의 어줍잖은 몸짓으로

누군가 잡아 일으켜 주길 바라며

아파하지도 않으면서 아픈 것처럼

쉬이 눈물 뿌리는 일

깊숙이 접어 둘 일이다

몇 마디의 선물이 오가고

축하의 노래 소리 들려오지만

굵게 살다 간 사람들의 고민

흉내나 내며

몇 잔의 소주에 지성인이랍시고

민중이니 혁명이니 탕탕 떠벌려 보지만

맑스나 그람시의 글줄

기도문처럼 암송도 해보지만

곰팡내 나는 지하 술집 외등만이

덩그러니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들은

성큼 어른이 되지는 못했다

-'성년식'

바로 여기서 그녀에게 서로의 남은 생을 함께 하자고 고백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난날의 상처와 아픔을 이겨내고 그 자리에 더욱 단단한 굳은살이 생겨나기 위해선 서로의 진실한 마음을 필요로 한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었다. 그 진심이 전해졌는지 그녀는 엷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고, 이제 송정은 나와 그녀에게서 더없이 중요한 잊을 수 없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그녀와 나는 십여 년 만에 이 자리에 섰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주위엔 나와 그녀를 닮은 수많은 청춘들이 이곳을 비밀의 정원처럼 여기며 밀어(蜜語)를 속삭이고 또 그네들의 소중한 기억의 장소로 만들어가고 있다. 여전히 백사장은 폭죽을 쏘아 올리는 역동적 에너지로 가득 차 있고, 이는 또한 우리들 삶의 영원한 원동력으로 이어질 것만 같다. 아까부터 맨발을 톡톡 치던 한 편의 그 시는 이제 나와 그녀의 발꿈치 뒤로 살짝 사라져 버리고, 멀리서 달려오는 딸아이의 유난스레 큰 목소리가 이를 대신하였다.

송정(松亭)은 나와 그녀가 차곡차곡 접어둔 추억의 앨범을 한 줄로 주욱 펼쳐놓은, 바로 우리들 청춘의 요람이자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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