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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쓰는 갈맷길 아라리 <9> 시인 김요아킴 '삼락강변공원'
부산작가회의  (Homepage) 2012-09-06 20:07:46, 조회 : 2,678, 추천 : 535

'투 스트라이크 투 볼'.

5회 초 투 아웃, 타석에 들어선 K는 무척 긴장한 듯 입술의 침이 바싹 말라 있다. 이미 모든 베이스를 채운 주자들은 팽팽한 동점 상황을 끝내려 끊임없이 홈을 곁눈질하고, 마운드 위 상대팀 투수가 쓴 모자 뒤로는 눈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베개 삼아 펼쳐져 있다. 아직 꽃들은 필 기색이 보이지 않는 이른 봄, 짙은 모래바람이 한바탕 그라운드를 휩쓸고 간 자리, K는 긴 호흡을 순간 멈추고 턱을 어깨에 바짝 당긴 채 자세를 최대한 낮추었다. 비록 빠른 공을 가진 투수였지만 이에 못지않은 배트 스피드를 가지고 있다. 앞 타석에서도 2루타를 쳐 약간의 자신감도 있었지만 여전히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공 하나에 살고 공 하나에 죽는 야구의 생리적 특성 때문에 정확한 히팅 포인트(Hitting point)를 머릿속에 그려보며 날아올 다음 공에 온몸의 신경을 증류하였다. 배트의 감촉은 좋았다. 손바닥에 몇 번의 물집이 터지고 박힌 굳은살과 배팅 장갑은 이미 한몸이 되어 33인치 검정색 TPX 알루미늄 배트가 가볍게 느껴졌다.

사실 이날 경기는 우연찮게 펼쳐졌다.

흔히 부산에서 사회인 야구를 하는 팀이라면 으레 찾는 삼락 강변공원에 위치한 야구장, 은빛 물살이 지난 시대의 역사처럼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을 끼고 드넓게 펼쳐진 이곳은 마치 성인이 되어서도 야구를 즐기는 프로야구 키드(Kid) 세대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또한 저 멀리 바람에 제 몸을 뒤척이는 갈대와 강서로 이어지는 다리 너머로 그려지는 일몰의 풍경은 야구 외에 또 다른 즐거움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K가 속한 팀도 올해 치러질 시즌을 대비해 자체 연습을 할 요량으로 이곳을 찾았지만, 구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다행히 날씨가 차가운 탓인지 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드물어 공터 한쪽에 장비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스트레칭을 하고 이어 캐치볼과 내야 펑고 연습을 하며 서서히 몸을 데울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도 이렇게 공을 잡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한 K는 문득 몇 년 전 팀에 입단하기 위해 테스트를 받던 기억이 났다. 30대 중반의 나이, 어린 시절 화려했던 동네야구의 실력만을 생각하며 무턱대고 도전했던 사회인 야구의 벽은 꽤나 높았었다. 단지 열정만으로 현실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잊고 야구의 기본기부터 새로 배워야 하는 과정은 실로 만만찮았다.

어느덧 K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히고 거친 숨과 함께 유니폼이 조금씩 젖어갈 무렵, 옆 구장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훈련하던 신생팀이 넌지시 K가 속한 팀으로 연습경기를 청해 왔다. 그리고 이는 두말없이 성사되어 곧바로 시합으로 이어졌다.

K가 본격적으로 야구에 입문한 지는 만 5년, 대부분의 사회인 야구를 하는 선수들이 그렇듯 이들의 유년시절엔 늘 동네야구가 기억의 원형질 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K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등학생 시절 그는 고교야구의 열성팬이었다. 특히 봉황대기나 청룡기 대회는 빼놓지 않고 라디오 중계를 들으며 아나운서의 말을 통해 선수들의 동작과 플레이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더군다나 고향인 M도시의 라이벌 두 고교가 대회에 출전하는 날이면 밥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어른들처럼 목을 빼고 열광적인 응원을 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으레 동네 공터엔 아이들이 몰려와 야구시합이 이뤄졌고, K는 늘 마운드에 서서 당시 그의 우상 최동원 투수의 역동적인 투구 폼을 흉내 내며 매번 삼진을 잡아내기도 했다. 또한 시합이 없는 날이면 남동생과 함께 작은 집 마당에서 신문지를 테이프로 감아 만든 공으로 빨래방망이를 휘두르기도 했다. 1970년대가 마지막으로 저물 무렵인 그해도 그랬었다.

신문지를 말았다

오늘의 TV 프로그램과

1면의 만화 4컷 외엔 별 필요 없는

종이를 둥글게 말았다

어려운 한자로 검열된 기사들이

삐죽삐죽 불거져 나와

쉽사리 공으로 환생되질 않았다

급하게 청색테이프로 봉합한다

어린 고사리 손은 만화 속

마구를 꿈꾸며

동생이 든 빨래방망이를 향했다

집 마당은 좁았다

사르비아 꽃대들이 촘촘하게

전진 수비를 섰고

10월의 뒷집 감나무는

우두커니 관중이 되었다

공은 셋 포지션에서

은폐된 진실처럼 정직하지 못했고

결국 정타로 맞은 신문지공은

한 장의 너덜해진 흑백사진을

각혈하고 말았다

총탄에 맞아 쓰러진 어느

한 독재자의 붉은 말로처럼

(시 '종이공 신화')

그리고 80년대는 남도의 한 도시에서 붉은 바람이 일면서 시작되었다.

중학생이 된 K는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하여 동대문구장에서 시구를 하며 프로야구가 출범되는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6개 팀이 지역을 연고로 창단하여 온 나라가 여섯 등분 되어버렸고, 그때부터 K는 고향에 뿌리를 둔 L팀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 친구들과 대화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 초미의 관심사인 L팀이 이기고 지느냐에 따라 그날 하루의 기분이 좌우되곤 했다. 게다가 라이벌인 H팀과의 경기 때는 거의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의 주술적인 응원을 토해내었었다. 물론 K가 대학생이 되고 세상을 알면서 그렇게 신봉했던 프로야구가 국민을 우민화하는 3S 정책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배신감 때문에 한때 이를 등진 적도 있었지만, 그 열정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고 결국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날 라면은 불었다

텅 빈 집 오후의 곤로 위엔

동대문구장에 모인 관중들만큼의

끓는점이 양은 냄비에 쏟아졌다

동네에서 처음 산 컬러 TV엔

늘 학교 벽 높이 걸린 그분이 걸어 나왔고

요란한 팡파르에 주말은 더욱 환했다

마운드에서 첫 번째로 던진 그분의 공

비록 어색한 자세였지만

위력적인 마구에 놀라 나는

급하게 면과 스프를 뜯어 넣었다

실력으로 환전되어갈 돈 냄새는

적당히 6등분하여 마련된 마스코트 위로

사람들의 마니아 본능을 자극했고

나도 앞으로 내 고향 팀을

열렬히 숭배키로 했다

그날 푸른 용과 사자는 그분을 위해

손에 땀을 쥐게 할 동점상황과

이어 짜릿한 만루 홈런을 연출했고

어느새 내 라면도 퉁퉁 불어갔다

(시 '1982년 3월 27일')

이제 상대팀 투수의 공은 던져졌다.

빠르게 바람을 가르는 인코스 높은 직구였는데, 회전하는 그 공의 실밥은 K의 눈에 곧장 들어왔다. 몸은 정확히 반응했다. 지난 여름, 곰팡내 나는 지하의 한 베이스볼 아카데미에서 몇 바가지의 땀과 손에 물집이 잡혀가며 T와 토스 배팅으로 익힌 교과서적인 자세가 그대로 그 공에 집중되었다. 배트의 회전촉은 간결하였으며 스위트 스폿(Sweet spot)에서 터진 경쾌한 울림이 끝까지 이어지는 팔로우 스윙과 함께 창공을 비행하기 시작했다. 공기의 저항을 끝까지 이겨내며 낙조에 비쳐 더욱 하얗게 보이는 공은 좌측 펜스를 훌쩍 넘어가고 말았다. K의 생애 첫 홈런, 그것도 그랜드 슬램(Grand slam)으로 장식하며 앞의 주자들을 무사히 홈으로 불러들였고, 그도 천천히 베이스를 밟으며 강변 구장의 풍경들을 응시했다. 둑 너머 촘촘하게 늘어서있는 공장들의 낡은 굴뚝과 화려함으로 무장한 대형마트, 그리고 그 반대편으로 펼쳐진 넓은 평야와 그라운드에서 고개를 풀썩 숙인 9명의 그림자, 순간 팽팽했던 경기는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K는 문득 일본의 야구선수 니시오카 츠요시의 말을 다시금 곱씹어 본다. '야구라는 스포츠는 경기장에서 땀 흘리는 게 아니라 경기 전에 땀 흘리는 것이다. 야구는 힘들다. 안 보이는 곳에서 열심히 해야 하니까.'

K에게 있어 이제 삼락 강변 야구장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다.

그 일이 터지기엔 낙동강변 삼락(三樂)구장을 필요로 한다 피부를 긴장시킬 듯한 약간의 편서풍이 모래를 자극하고 꽃들은 여전히 필 기색이 보이지 않아야 한다 금쪽같은 휴일은 반납되어야 하고 아내와 딸아이들의 원성도 적절히 뒤따라야 한다 타순은 5번이어야 하며 적어도 두 번째 타석엔 2루까지 안착하며 몸을 예열시켜야 한다 며칠 전 장만한 배팅 장갑은 땀으로 물집 잡힌 손바닥을 위무하고 방망이의 감촉은 마땅히 가벼워야 한다 점수 차는 5회까지 시소를 타야 하고 베이스엔 이미 우리 팀 주자들로 꽉 차있어야 한다 상대 마운드의 마음은 빠르지만 정직해야 하고 볼 카운트는 투 스트라이크 투 볼이어야 한다 크게 호흡을 들이키며 참았던 숨을 내지를 때 이제 그 일이 터질 차례이다

눈에 익은 공은 한가운데로 몰리며 높을 것이고 온몸을 실어 스윙을 한 다음엔 더 이상 1루로 뛰어 나갈 이유도 사라질 것이다 '와'하는 탄성에 실려 하얀 공은 급하게 담장을 넘어 버릴 것이고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기만 할 것이다 천천히 홈을 관조하며 어떤 세레모니를 할까를 궁리해야할 것이고 경기 뒤 얇아질 지갑과 거래할 막걸리 병수를 헤아려 봐야할 것이다

세 가지 즐거움을 주는 강변구장은 잊지 못할 생의 영원한 필드이다

(시 '그랜드 슬램1- 필요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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