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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쓰는 갈맷길 아라리 <10> 시인 이은주 '다대포 처녀 윤백련 이야기'
부산작가회의  (Homepage) 2012-09-11 10:56:21, 조회 : 3,114, 추천 : 672

- 둥근 달이 돼 떠올라

나는 부산 토박이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면서 40여 년을 부산에 뿌리를 박고 살고 있다. 보름 이상을 부산을 떠나본 적이 없어서인지 늘 마음이 밖으로 향한다. 언제쯤 부산을 떠나 단 일 년만이라도 다른 곳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 늘 하는 말이라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듣는지 모르겠지만 진심이다.

"부산은 정말 살기 좋은 데라."

시를 쓰고 흙을 빚으시는 정의태 선생님이 부산이 지겨워죽겠다는 내 말을 받으셨다.

"부산이 어디가 그렇게 좋으신대예?"

"온통 산이라 조금만 가면 숲을 만날 수 있고, 또 조그만 걸어가면 강길을 걸을 수 있지. 그것뿐인가. 조금만 가면 바다도 만날 수 있는데…. 여기만큼 살기 좋은 데가 없는 거라. 내가 부산을 떠나 살아보니까, 부산이 최고더라."

곰곰 생각해 보니 강과 산, 바다를 이렇게 가까이서 즐길 수 있는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다 문득 내가 살고 있는 고장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친김에 내가 가보지 않은 곳, 부산 곳곳을 한 번 찾아가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여름 휴가를 맞아 부산에 살면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몰운대가 있는 다대동으로 발길을 향했다. 도로를 가운데로 이편에는 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고, 또 다른 저편에는 바다가 펼쳐져 있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이름이 주는 낭만적인 풍경을 기대하며 몰운산으로 들었다. 숲길은 완만하고 조용해서 걷기에 좋았다. 해송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새들의 대화 소리는 산책의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구불구불 산길을 걸어 몰운대에 오르니 눈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아, 여기는 남해구나! 군데군데 작은 섬들이 펼쳐져 있어 다도해라 부르는 남해의 진미를 느낄 수 있었다.

"몰운대는 낙조가 유명하니까, 그건 꼭 보고 온나. 그걸 못 보면 몰운대에 갔다 온 게 아이다."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몰운대를 돌아 나왔다.

몰운대 한 쪽은 다대포구이다. 도시 속 어촌이랄까. 바다를 가로질러 길을 내고 있는 나무다리는 사진 속 풍경처럼 고즈넉했다. 또 한 쪽은 다대포해수욕장이다. 광안리 바닷가나 해운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길게 뻗어 있는 백사장의 모래는 부드러웠다. 모래와 갯벌이 섞여 있어 발을 디딜 때마다 발을 찰찰 감는 듯했다.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눈부시게 반짝이던 바다가 잔잔해지더니 온통 붉게 젖어들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하늘과 산, 모래밭을 거닐던 사람도 하나의 풍경 속에 담겨 붉어지고 있었다. 이때 몰운대 끝자락에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크고 둥근 달이, 아름다운 풍경에 젖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검붉은 기운이 가시고 검푸른 기운이 살아나더니 보름달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달 속에 백련이의 슬픈 얼굴이 어린다.

"뎅에엥, 뎅에엥, 뎅에엥…."

해가 질 무렵 마을에 징소리가 울려퍼진다. 야망대에 올라 멸치떼가 몰려오는지 살피던 떡배 아저씨가 달려 내려오며 소리친다.

"왔다, 왔다! 퍼떡 바다로 나가재이."

징소리를 기다리던 어부들은 모두 신이 나서 바쁘게 그물을 끌어 배에 싣기 시작한다. 떡배 아저씨가 바다를 가리키며 목청껏 소리를 내지른다.

"어부님네 한 마음 일심으로 그물을 잘 사려 실읍시다!"

모두들 힘을 모아 그물을 끌며 힘차게 노래를 부른다. 굵은 팔뚝에 힘줄이 불끈불끈 솟아오른다. 노랫소리는 바다로 하늘로 퍼져 나간다.

"에-헤이 사리야!"

"에-헤이 사리야!"

"사려보세 사려보세, 그물 한 채를 사려보세."

"멸치잡아 무엇하리, 열두 독 젓을 담아, 황금빛에 맛들거든, 첫째독은 헐어다가 나라에 상납하고, 둘째독은 헐어다가…."

바다에 나간 배가 후리그물을 치고 있을 때 아낙들과 아이들도 노래를 따라 부르며 그물 가득 멸치가 잡히길 용왕님께 두 손을 모아 빈다. 백련이도 어머니 옆에 서서 풍어를 기원하며 용왕님께 용왕제를 올린다. 그물에 가득 걸린 은빛 멸치를 털어 소쿠리에 담아 저장통에 옮겨 담는 손들이 분주한다. 어둑해져가던 마을도 은빛으로 파닥이며 환해지는 듯하다. 이렇게 멸치잡이를 하는 날은 마을 사람 모두가 배가 부르고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낙동강 하구에 자리를 잡고 있는 백련이가 사는 마을은 왜구의 침입이 있기 전에는 한없이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깊은 밤을 틈타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은 나중에는 대낮에도 몰려와 곡식과 멸치를 훔쳐가고, 심지어 마을 사람들을 해치기도 했다.

왜구의 행포가 심해져 백성들의 원성이 잦아지자 나라에서 마을에 다대진을 설치하고 다대성을 쌓았다. 하지만 왜구의 노략질은 그치지 않았다. 농사를 짓고 고기잡이를 하며 순박하게 살아가던 마을은 어느새 긴장감이 맴도는 마을이 되어버렸다. 건장한 젊은이들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수군이 되어야 했으며 아낙들과 처녀들은 왜구에게 잡혀가 몹쓸 짓을 당할까 봐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날이 갈수록 왜구의 행포는 더욱 더 잔인해져 갔다.

"떡배,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 되겄는가. 처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창을 들어야 안 되겄나?"

"그라제, 이러다간 왜놈 손에 작살이 나겄데이."

백련이는 아버지와 떡배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글썽이고 있었다.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듣고만 있던 백련이 오라버니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부지요, 지가 수군이 될랍니더. 아부지는 어무이와 백련이를 위해서라도 집에 있어야 합니더."

"무슨 말이고? 그건 안 된다. 그라고 복룡이 니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아부지 대신에 어무이하고 백련이를 지켜야 한데이, 알겄제? 명심하거래이."

한동안 왜구의 침입이 잠잠하던 어느 날, 난리가 났으니 빨리 피해라는 아찔한 소식이 전해졌다. 왜군이 수백 척이나 되는 병선을 몰고 쳐들어온다는 거였다.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복룡아, 니는 백련이 데리고 빨리 숲속으로 피하거라."

"안 됩니더, 어무이가 백련이 데리고 어서 피하이소. 내가 성에 남아 왜군과 싸울 겁니더."

"아부지 말 잊어뿌린나? 니는 우짜든가 백련이를 잘 챙기야 한데이. 이 어미는 성에 남아 군인들을 도와야 한다. 어서 가거라!"

백련이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 복룡이는 백련이의 손을 꼭 붙잡고 어머니를 성에 남겨 둔 채 숲속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포 소리가 하늘을 찢을 놓을 듯이 울렸다. 밤이 깊도록 포 소리와 검은 불길이 그칠 줄을 몰랐다.

이튿날 복룡이와 백련이는 마을로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힘없이 무너져 내린 다대성 안에는 왜군에 맞서 싸우던 조선 수군과 마을 사람들의 시체가 여기저기에 늘려 있었다. 아비지옥이 따로 없었다. 성 안에 있는 집들도 죄다 불에 타고 있었다. 백련이의 어머니는 불 탄 집 안에 쓰러져 있었다.

"어무이, 어무이요, 눈 좀 떠 보이소!"

애타게 울부짖었으나 끝내 대답이 없었다.

백련이와 복룡이는 나무 밑에 어머니를 묻고 바닷가로 나가 아버지를 찾아 헤맸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둘은 손을 꼭 잡고 할아버지가 있는 동래로 발길을 돌렸다. 부산포도 이미 왜군의 손에 넘어간 뒤여서 온 마을이 시체무덤이었다. 두려움에 떨며 부산포를 지날 때 그만 왜군에게 발각돼 복룡이는 달아났으나 백련이는 붙잡히고 말았다. 포악한 왜군들은 사내는 보는 대로 창으로 찔러 죽이고 여자아이들은 산 채로 끌고 갔다.

몇 날 며칠이나 지났을까. 백련이는 왜군의 배에 갇혀 부모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에게 온몸이 찢겨나가는 모욕을 당하며 죽지 못해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혀를 깨물고 죽고만 싶었다. 백련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하는 자신이 더 원망스러웠지만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오라버니를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았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살아남아야 한다고 당부하던 부모님 말씀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왜군은 부산성과 다대성을 함락하고 김해로 쳐들어가 잔인하게 조선 땅을 피로 물들였다. 굶주린 금수로 변한 왜군들이 거제도로 가 옥포에서 분탕질을 일삼고 있을 때였다. 연합함대를 이끈 이순신 장군이 옥포 바닷가에 정박해 있던 왜선을 향해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콰광, 꽝!"

하늘을 쪼갤 듯한 포탄소리와 불길이 일었다. 백련이는 어두운 배 밑바닥에 갇혀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포탄소리를 들으며 공포에 몸을 떨어야 했다. 포탄을 맞아 배가 부서지는 소리와 왜군의 비명소리가 옥포바다를 메웠다. 왜군은 기습공격에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가 끝나고 전장을 수습하던 중 배 밑바닥에 숨어 있던 백련이를 발견했다. 짧은 머리에 왜복을 입고 무서움에 떨고 있는 백련이가 다대포에서 잡혀 와 왜군에게 온갖 수모를 당한 이야기를 듣던 이순신 장군은 주먹을 불끈 쥔 채 개탄하며 명을 내렸다.

"이 아이를 보성 땅으로 보내 잘 보살펴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도록 하여라!"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백련이는 보성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왜군들에게 능멸 당하던 순간들이 떠올라 고통스러웠다. 겨우 잠이 들면 꿈속에서도 그 흉악한 왜군들이 쫓아와 괴롭혀서 나날이 야위어갔다.

어느 날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백련이는 문득 오라버니와 바닷가에서 연을 날리던 순간이 떠올랐다.

'연…. 연을 날리자. 내 몸은 비록 고향에 갈 수 없지만 연은 날아갈 수 있을 거야.'

백련이는 부모님과 오라버니를 그리워하는 글귀를 적어 저 푸른 하늘로 연을 날리면 그 마음이 꼭 가닿을 것만 같았다.

보름달빛이 유난히 밝은 밤, 백련이는 은빛 물고기 연을 들고 바닷가로 나갔다. 얼레를 천천히 돌리며 실을 풀자 연은 바람을 타고 고향 바닷가 쪽으로 하늘거리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달빛에 은빛 지느러미가 반짝이자 백련이의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연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보름달에 가닿았다. 마치 달 속에서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듯했다. 백련이의 사무친 그리움은 연실처럼 술술 풀려 고향 땅을 향해 물결쳐 가고 있었다.

다대포 몰운대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듯이 지는 해와 달이 만나는 곳이다. 왜군에게 짓밟힌 백련이의 눈물이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고향을 그리는 백련이의 마음이 달로 뜨는 곳이다.

"몰운대에 가면 꼭 백련이를 만나고 온나, 안 그라면 몰운대에 갔다 온 게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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