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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쓰는 갈맷길 아라리 <16> 시인 이은주 '금정산 생명 장승 이야기'
부산작가회의  (Homepage) 2012-11-04 18:45:07, 조회 : 2,691, 추천 : 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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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장승은 부산시민 수호신

금정산 동문 들머리에는 장승이 있다. 생명을 살리는 여장군과 평화를 지키는 대장군이다. 여장군의 눈은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 보며 입을 벙긋거리는 모습을 닮았고, 대장군의 눈은 새의 활짝 편 날개를 닮았다. 사람들은 장승을 보며 무섭다 하기도 하고, 가끔은 익살스러워 웃음이 난다고도 한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기분에 따라 장승의 표정도 달라 보이는 것이리라.

이곳에 터를 옮기기 전 장승 나무가 살던 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깊은 숲속이었다. 잎에 와 닿는 간지러운 햇살, 상큼한 바람과 비의 냄새를 맡으며 땅속으로 깊게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가지를 뻗고 있었다. 어느 날 부산에 사는 사람들이 숲속을 다니며 신령스러운 기운이 감도는 두 그루의 나무를 찾아냈다. 그 사람들은 정성을 다해 제를 올리고 나무의 몸을 다듬어 생명살림여장군과 생명평화대장군을 만들어 동문 들머리 햇빛 잘 드는 평지에 모셨다. 그날 이후 장승은 날마다 금정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의 무수한 사연을 기다리며 귀를 활짝 열고 우뚝 서 있다.

하나, 건강한 아이를 가지게 해주세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산으로 남녀가 나란히 걸어온다. 가벼운 등산복 차림으로 말없이 걸어오다가 남자가 옷깃을 여며주자 여자는 팔짱을 끼며 살짝 웃는다. 배낭도 메지 않은 걸 보면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리라. 발걸음을 멈추고 여자가 고개를 들어 동문을 바라보더니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장승에게 맘을 다해 소원을 빌면 그 뜻을 하늘에 전해준대."

"이번이 벌써 세 번째야. 우리한텐 아이가 없나 보다. 한 번만 더 시도를 해 보고 이제 그만 두자. 아이를 가지기 위해 당신이 너무 고생이 많다. 주사를 맞은 당신의 멍든 배를 보면 자꾸 화가 나."

남자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꽉 다문다.

"절대 포기할 수 없어. 이때까지 어떻게 참아 왔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랬어. 당신도 포기하지 마.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게 더 힘들어."

둘은 장승 앞에 서서 옷을 가다듬고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모은다.

"생명살림여장군님, 저는 나쁜 짓도 하지 않고 살았어요. 우리에게도 아이를 점지해 주세요. 앞으로 더 착하게 살게요. 이 사람을 닮은 건강한 아이를 제게 주세요."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가볍게 들썩이는 여자의 어깨를 잡아준다. 남자의 눈가도 뜨거워진다. 멀리 아침햇살이 길게 뻗어오며 두 사람의 몸에 스며든다. 두 사람은 한동안 가만히 서서 장승 앞을 떠날 줄 모른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금샘에 가서도 빌어보자. 하늘에서 내려온 금어가 살았다고 하잖아. 어쩜 당신 말대로 우리가 진심으로 빌고 또 빌면 우리 자식이 생길 지도 모르겠다. 할 수 있는 데까진 다 해보자."

남자의 말에 아내는 눈물을 닦으며 살짝 웃는다.

"그래, 그래야지. 어쩜이 아니라 꼭 들어주실 거야.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하자. 그래야지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가닿을 거야."

두 손을 꼭 잡고 동문을 향해 난 숲길로 접어드는 부부의 등 뒤에서 생명살림여장군과 생명평화대장군이 고개를 끄덕여주는 듯하다.



하나, 우리 가족이 함께 살게 해주세요.

"다솜아, 오늘은 꼭 가야 한다. 빨리 일어나라."

일요일이라 늦잠을 자고 있는 딸을 깨우기 위해 아침부터 수진이 집은 소란스럽다.

"혼자 가면 안 돼? 난 정말 산에 가기 싫단 말야. 왜 꼭 산에서 아빠를 만나야 하는데?"

"몰라서 묻는 거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짜증을 부리는 딸을 깨우기 위해 수진이는 방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아빠를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잖아. 그리고 함께 등산하기로 벌써 몇 달 전부터 약속이 돼 있는 건데, 왜 딴 소리야. 퍼뜩 일어나라."

수진이는 중학생인 딸 다솜이를 억지로 깨워 범어사를 향해 차를 몰았다. 남편과 헤어지면서 다솜이를 위해 꼭 일 년에 한 번은 셋이서 등산을 하기로 약속을 했다. 어릴 때 다솜이는 아빠를 따라 등산 다니는 걸 아주 좋아했다. 오히려 수진이가 등산을 싫어해서 늘 혼자 집에 남아 있겠다 해서 가끔 말다툼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빠, 일찍 왔네. 나 이제 산행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범어사 일주문 앞에서 딸을 기다리던 민식이는 투덜거리는 딸을 보면서 섭섭한 마음이 든다. 어릴 때는 손을 꼭 잡고 졸졸 따라다니던 녀석이 이젠 서먹해 하는 것이 못내 마음이 아프다.

"만나자마자 투덜거리네. 아빠는 다솜이하고 손잡고 걷고 싶은데…. 억지로 가는 건 좀 그런데…."

"기왕 왔으니 가야지. 오랜만에 산성 돌담을 걸으면서 예전에 엄마와 아빠랑 살던 집을 찾아봐야겠어."

민식이와 다솜이가 앞장을 서서 걷고 그 뒤를 수진이가 따랐다. 범어사 옆길로 난 숲속으로 들어가 경사진 돌길을 걸으니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시큰둥하던 다솜이가 오히려 성큼성큼 산길을 잘 오른다. 북문을 향해 올라가는 길에는 돌이 많아 힘들 텐데, 가기 싫다고 투덜댈 때와는 달리 민식이를 앞질러 올라간다.

산행을 좋아하지 않는 수진이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걷는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면서 앞서 걸어가는 민식이의 등을 바라본다. 이제 커버렸다고 아빠 손도 잡지 않는 딸을 뒤따라 걷는 모습이 측은하고 살짝 굽은 등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수진이는 갑자기 고개를 젓는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내 자신 몰래 형에게 돈을 빌려준 민식이에게 느꼈던 배신감이 되살아난다. 사업을 하던 형이 금방 갚겠다며 돈을 빌려갔지만 집은 결국 은행에 넘어가버리고 하루 아침에 거리에 쫓겨난 신세가 되었던 그때가 생각나서이다. 깊은 한숨을 내쉬자 발걸음이 더 무거워지는 듯하다.

북문에서 민식이와 다솜이가 땀을 식히며 기다리고 있다. 다솜이를 보며 수진이는 애써 웃는다.

"엄마, 왜 이렇게 느려? 그러니까 내가 평소에 운동 좀 하시라고 했잖아."

수진이의 기분도 모르고 다솜이는 잔소리를 해댄다. 옆에서 머쓱하게 듣고 있던 민식이가 조심스레 한 마디 건넨다.

"엄마는 원래 산을 잘 못 타잖아. 잔소리 그만 하고 세심정에 가서 목이나 축이자."

북문을 지나 세심정에 다다라 물을 마시고 나니 속상했던 수진이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하다. 세심정(洗心井)이라는 한자를 보면서 수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씻을 수 있을까.'

다솜이는 능선을 타고 걷는 길을 좋아한다. 북문을 지나 동문을 향해 능선을 따라 걷다가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시야가 확 트인다. 다솜이는 예전에 살던 아파트가 어렴풋이 보이는 광안대교 쪽을 말없이 보며 서 있다. 민식이와 수진이도 다솜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지만 그때 그 일이 있기 전 셋이서 알콩달콩 살던 때가 떠올라 한 곳을 바라보는 게 싫지는 않다.

계속 구불구불 이어지는 돌담길을 걸으며 수진이는 세심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자신의 마음에도 '세심정'이 음각돼 있는 착각에 빠진다. 동문을 지나니 내리막길이 나온다. 다솜이가 보이지 않아 조금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니 민식이와 나란히 서서 장승에 쓰인 글자를 읽고 있다.

"생명살림여장군! 생명평화대장군!"

이곳에 언제부터 장승이 살았지, 의아해 하며 수진이도 다솜이 곁으로 다가간다. 다솜이는 대장군의 목에 다닥다닥 붙어서 자라고 있는 노란 버섯을 신기하다며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을 감는다. 갑자기 진지해진 다솜이를 쳐다보다 둘은 눈이 마주친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은 가늘게 떨린다. 어색해진 두 사람은 아내 다시 고개를 돌려 다솜이를 따라 눈을 감는다.

'장승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세 식구가 다시 함께 살게 해주세요.'

다솜이는 한 손으로는 아빠의 손을, 다른 한 손으로는 엄마의 손을 꽉 잡는다. 마치 둘을 이어주는 끈끈한 매듭이 돼 다시는 풀지 않을 듯이.



하나, 엄마가 다시 건강을 찾게 하세요.

"우와, 부산, 양산까지 다 보인다!"

처음으로 고당봉까지 오른 주연이는 쉴새없이 감탄사를 날린다. 산을 좋아해 쉬는 날마다 산행을 하는 친구 명선이를 따라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고소공포증이 있어 높고 가파른 곳을 잘 오르지 못하는 주연이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명선이의 거듭되는 권유에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다.

"내 말 맞제? 마음에 있는 근심을 다 날려버리고 가자. 어머니도 곧 예전처럼 좋아지실 거다."

주연이의 어머니는 두 달 전 갑자기 위암 선고를 받고 일주일 만에 수술을 하셨다. 지금은 항암제를 드시면서 경과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수술도 잘 되고 몸이 조금씩 회복되는 것 같아 지금은 한시름 놓은 상태지만 한 달 전만 해도 주연이는 밤마다 눈물바람이었다. 고생만 하시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는 건 아닌지, 약 때문에 밥이 모래 같다며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는 게 마음이 아파 울컥할 때가 잦았다.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명선이는 주연이가 내색을 하지 않아도 힘든 것을 알고 있는 터라 일부러 산행을 종용한 것이다.

"지금은 나무계단이 있어서 올라오기도 쉽다. 예전엔 밧줄 타고 올라왔다아이가. 그때도 스릴 있어서 좋았다."

둘이는 굽이굽이 낙동강 줄기와 넓디넓은 김해평야를 한참동안 내려다보다 다시 북문으로 향한다. 눈이 아플 정도로 푸른 하늘빛에 주연이의 가슴팍을 부옇게 가리고 있던 안내가 걷히는 듯하다. 금정산은 휴일이면 늘 등산객들로 붐빈다. 가을이라 산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점심을 나눠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주연이는 산에서는 사람도 하나의 풍경이 된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명선이는 동문으로 길을 잡는다. 몇 년 전에 세워진 장승을 주연이에게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사람은 어려움에 처하면 실오라기 희망도 잡고 싶은 법이다. 아니 그 희망이라도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생명이란 사람이 관장하는 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은 거대한 자연의 기운에 따라 움직인다고 명선이는 생각한다.

먼 길도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언젠가는 목적지에 이른다. 가파른 길도 만나지만 또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면 몸을 쉴 수 있는 평탄한 길도 만난다. 힘든 길을 갈 때는 옆에 함께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주연이는 툴툴거리면서도 늘 자신을 챙겨주고 마음 써주는 명선이가 곁에 있어서 든든하고 고맙다.

장승을 만나자 주연이는 멀리 떨어져 물끄러미 바라본다. 눈이 부셔서 손으로 빛을 가려가며 장승의 표정을 살핀다. 앞가르마를 한 여장군의 얼굴이 돌아가신 외할머니 얼굴과 겹쳐진다. 이내 주연이는 풀밭을 조심조심 걸어가 여장군을 껴안고 눈을 감으며 빙그레 웃는다. 지켜만 보고 있던 명선이도 덩달아 대장군을 껴안으며 웃는다. 명선이는 안다. 주연이가 여장군을 껴안은 채 어떤 기도를 올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바람이 꼭 이루어질 거라는 것도.

■ 약력
● 2000년 '다층' 시 부문 신인상 당선
● 부산작가회의 회원, 시전문 계간지 '신생' 편집장
● 다층문학회 회원, 웹 월간詩 '젊은시인들'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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