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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쓰는 갈맷길 아라리 <19> 소설가 최은순 '떠나려는 당신에게-기장 이곡마을'
부산작가회의  (Homepage) 2012-11-20 15:40:57, 조회 : 2,413, 추천 : 407

산등성이를 타고 내지르는 바람의 비명도 죽음을 드리운 길, 망자의 침묵에 휩싸인 길을 깨우지 못했다. 슬프게도. 그 길은 형형색색의 색종이 가루가 날리면서 등장한 '보통사람'의 시대도, 유래 없는 동서화합의 체육 대전이 열리던 시대를 기억하고 있겠지만, 한편으로 그 길은 '보통사람'도 체전도 독재와 싸워 이긴 민주화의 이름과 함께 찾아온 경제대란으로 모든 것들이 여지없이 허물어지던 시대였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이곡리 할배당은 녹슨 철문을 열 듯 힘겹게 눈을 떴다. 전쟁보다도 더한, 아니 적이 누군지도 분간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 했고, 할배당은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궜다. 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 산천을 헤매고, 들리지 않을 인간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노력도 멈추어야 했다. 그리하여. 할배당은 마지막 교신을 보낸다. 참담함으로 일그러진 할배당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위이―잉. 골짜기마다 설치된 송전탑에 가로막혀 신호가 튕겨나가기 일쑤다. 빌어먹을.

―3535353535

그때 할배당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삐삐가 요동치고, 흐릿한 계기판에 보이는 숫자에 할배당은 안심한다. 소매로 눈물을 훔친 할배당의 시선이 산천으로 향한다. 무연히.

어둠조차 교교히 달빛에 으스러지는 밤이건만 두 손 가득 달빛을 담아 님에게 부치고픈, 그런 밤은 아니었다. 정녕. 옷깃을 파고드는 칼을 매단 바람이며, 더더구나 서른 걸음은 족히 앞서 총총히 걸어가는 할멈을 놓칠세라 영감은 아까부터 시린 눈을,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면서도 두 눈을 부릅뜨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맞을.

아홉산 끝자락을 붙들고 선 숲길을 걸으면서도 웅천리 할멈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고촌리 할매당과 할배당을 회의에 소집한 이곡마을 할배당의 의중도 의중이지만 그에 순순히 응한 고촌리 할매, 할배의 심리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을에 터를 잡은 시기는 앞설지 모르나 기껏 입향조로, 어디 듣도 보도 못한 집안의 조상이랍시고 설레발쳐대는 이곡마을 할배당의 꼬락서니가 할멈은 이만저만 못마땅한 게 아니었다. 육시랄. 이 마당에 얼른 쫓아올 생각도 않고 물끄러미 달만 쳐다보고 있는 영감을 할멈은 쏘아보았다.

―거, 빨리 안 오고 뭐하고 섰노.

서슬 퍼런 할멈의 목소리가 영감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섬뜩.

갈치고개를 휘감고 도는 바람을 달빛도 어쩌지 못하는 듯했다. 아쉽게도. 오 리의 절반을 걸어 능선을 넘었나 싶었지만 여전히 달은 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박 씨 할매는 앞서가는 신령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더더구나 길 가장자리에 늘어선 요상한 그림을 한 깃발이 기괴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흘낏.

―신령님, 저건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요. 온 천지를 다 돌아다녀도 저런 것은 처음 보는데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을 연신 쳐다보며 답을 기다리는 박 씨 할매의 성화를 알면서도 신령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고개를 오르는 길은 편리함을 위해 단단하게 굳어져 있고, 거기에 내리꽂힌 깃발이, 도무지 가 닿지 않는 인간들의 바람이 안타까워 신령은 한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조용히.

당산나무는 이곡 마을 당제 앞마당에서 휘청대고 있었다. 쓸쓸히. 다 쓰러져가는 당제 안에는 이곡마을 할배당이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고, 할매당은 기력이 쇠약해진 탓으로 웅크리고만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팔 척 장신의 거구가 비바람에 쓸린 것 마냥 을씨년스러워 마음이 절로 숙연해지면서도 웅천리 할매당은 밖에서 얻어터지고 들어온 자식을 보는 것처럼 속에서 부하가 치밀어 올랐다.

―거, 왜 바쁜 할매, 할배들한테 이리 먼 길을 오라 가라 하요? 야? 어디서 굴러먹다 온 뼈다귀 같은 게, 상전을 못 알아봐도 분수가 있지. 이래 모일 것이면 당연히 고촌리 할매, 할배한테로 가야 하지 않느냔 말이요?

그릇을 부시는 소리가 이곡마을 할배당에게로 날아들었지만, 할배당은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초연하게. 웅천리 영감은 할멈의 성화에 안절부절 하며 서 있을 뿐이었다.

―아이고, 먼저들 오셨나보네.

점점 험악해지려는 분위기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낭낭한 목소리의 박 씨 할매가 당제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홀연히. 그 뒤로 신령과 고촌리 할매당과 할배당이 들어왔다. 이곡마을 할배당은 그제야 눈을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웅천리 할매당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촌리 할매당과 할배당에게 연신 굽신거리며 그들을 상석에 앉혔다.

길을 잃고 떠돌던 바람이 당제 밖을 지켰다. 이윽고 죽음과 같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던 산천도 당제 안으로 슬며시 몸을 기울였다. 할매와 할배들에게서 나는 세월의 냄새가 당제 안을 가득 채웠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터널과 고가도로와 골프장, 무엇보다 인간들에게 내어주고 사방 천지로 떠돌던 오랜 세월들에 묻은 냄새.

―이레 모인 것도 십 오년 만이지요. 그간 다들 평안하셨습니까?

―평안하기는요, 일 년에 하루 있는 당제도 인간들이 잊어버리기 일쑤여서 제대로 된 젯밥을 얻어먹어 본지가 언젠지도 모르겠는데요.

―당산 나무도, 당제도 없어지고 있는 마당에 젯밥은 무슨.

웅천리 할멈이 당치도 않다는 듯 안평리 박 씨 할매에게 쏘아붙였다.

―그렇지요, 요즘 인간들은 더 이상 우리들에게 그들의 바람이나 염원을 얘기하지 않지요.

―연꽃 축제니, 한우 축제니 하며 잠깐의 휴식의 차원에서 자연을 찾을 뿐이지요. 어쩌면 인간들의 마음이 너무 먼 미래에 가 있는 걸지도요. 옛날처럼 이웃해 사는 인간들과 마음을 모으려 하지도 않아요.

―잘려나가는 나무들과 변해가는 길의 꼬락서니는 또 어떻고요. 갈수록 동네는 깨끗해지는데 어째서 우리들이 있을 자리는 없어지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이제는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곡마을 할배당의 말에 당제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미 예감하고 있었지만, 온 산천을 떠돌며 헤매기에는 너무도 지쳐버린 할매당과 할배당이었지만, 막상 떠나야 할 때가 임박하고부터는, 정말로 그래야만 하는 시기가 왔음을 알고부터는 서글퍼졌다. 무척이나.

―이 땅에는 더 이상 우리가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균천(均天)으로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다 같이요.

―그렇지만….

고촌리 할배당이 한숨을 내쉬듯 한 말이었다. 이곡마을 할배당의 말에 침울했던 표정의 할매, 할배들이 일제히 고촌리 할배당을 쳐다보았다.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던 할배당이었기에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섞인 표정들이었다.

―인간들이 우리를 찾지 않는다고 떠나면 쓰나. 시대가 이미 옛날과 같지 않는데.

―이젠 삐삐도 안 통하는 시댄데, 그럼 어쩌라고요?

웅촌리 할멈이 퉁명스럽게 되받아쳤다.

―허허, 저, 그러니까… 옛부터 하늘은 아홉 가지의 종류가 있지 않소. 중앙은 균천(均天), 동쪽은 창천(蒼天), 북동쪽은 변천(變天), 북쪽은 현천(玄天), 북서쪽은 유천(幽天), 서쪽은… 그러니까 서쪽은 뭐였더라.

―호호호, 서쪽은 호천(昊天)이지요.

안평리 박 씨 할매당의 웃음 띤 목소리가 당제 안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하하, 그렇지요. 서쪽은 호천(昊天), 남서쪽은 주천(朱天), 남쪽은 염천(炎天), 남동쪽은 양천(陽天)이지요. 지금 모인 당신(堂神)들이 여덟이니, 중앙의 균천(均天)을 제외하고 각자가 하나씩 맡으면 되겠구료. 당재와 당산나무에만 의존하지 말고 좀 더 넓고도 높은 곳으로 가서 인간들을 살펴보는 게 어떻겠소?

―그럼, 중앙의 균천(均天)은 어쩌고요?

―그건 마땅히 우리 당신(堂神)들을 주재하시는 하늘님이 계신 곳이 아니겠소.

―그렇다면 고촌리 할배당께서 말씀하시는 넓고도 높은 곳은 어디입니까?

―그야, 우리에겐 아홉산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스마트폰도 있지요.

안평리 신령의 물음에 고촌리 할매당은 호기롭게 웃었다. 아홉산이라…. 장전마을에서 회동마을 방향으로 길게 드러누워 있는, 아홉 개의 작은 등성이로 이어진 산. 당제 안을 가득 채웠던 세월의 냄새도, 당제 밖을 지키던 바람도 벌써 아홉산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당신(堂神)들도 서둘러 아홉산으로 향했다.

삼경(三更)이 훨씬 지나 있었지만 달빛은 청청했다. 무던히. 아홉산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바람에는 온기가 실리고 계곡이 스스로 몸을 열어젖혔다. 구석구석. 아홉산 아홉 등성이를 오른 각각의 당신(堂神)들은 일제히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실망하실 이도 있겠지만, 이건 미래지향형 스마트폰이라오. 한마디로 말해 맞춤형이지. 일단은 부르는 기능밖에 없소. 각각의 등성이에서 신들께서는 불러야 하오.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저들 자연을 흔들어 깨워야 하오. 그리고 알아두어야 하오. 인간들의 마음을 불러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인간을 불러들일 때에만 수신기능이 생길 것이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부르는 기능밖에 없을 것이니 명심해야 하오. 그러한 정성이 모아진다면, 그래서 하늘님이 아신다면 언제까지고 여러분들이 계시길 원하는 여기 이곳에 머무를 수 있지 않겠소.

고촌리 할배당의 의연한 목소리가 아홉산을 맴돌고 돌아, 신기(神氣)도 공력(功力)도 그 힘이 다한 그들 마음에 안도와 기쁨의 불씨를 당겼다. 수연히. 당신(堂神)들은 부를 것이었다. 사라져가는 산천을, 그곳에 살던 짐승들을. 그들이 떠나지 않기를 기도 할 것이었다. 부디. 그래서 자연을 호위하는 신들을 잊어버린,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친 인간들이 찾아와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소망할 것이었다. 흔연히.

■ 약력
● 201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로딩하는 남자' 당선
● 부산작가회의 청년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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